* 정상에 선 '스포츠 한양' : 프로와 견주어 손색없는 대학 스포츠팀으로 한양대 선수들이 정상에 섰던 한해였다. 대학야구에서는 3년만에 정상 탈환,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7년만에 정상 복귀, 유도 단체전에서 남자부 우승을 거머쥐는 등 여러 대회에서 최절정의 기량을 선보였다. 운동선수 중 가장 많은 여성팬을 갖고 있다는 배구스타 김세진 동문은 당시 3학년 재학중에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 '입시 전쟁'의 서막 : 교무처 산하 입학관리과를 신설하고 서울과 안산캠퍼스 전학과에 대학별고사를 도입하는 등, 당시 입학 판도를 이끌었던 한양대. 한 언론사는 뜨거운 입시 전쟁 상황을 '잎시 앞두고 대학 홍보전 점입가경'이라고 표현했다. 당시 한양대의 슬로건은 '발전하는 대학이 미래를 약속합니다'. 그 해 특차 모집 합격자의 평균 수능점수는 162.9점이었고 수석의 영광은 광양고 김동원 군에게 돌아갔다.
* 시대의 소용돌이, 한총련 : 한양대만의 이슈는 아니었지만 당시 대학가는 '한총련'을 빼고 얘기할 수가 없다. 바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의 사무실이 한양대 내에 있었던 것. 때문에 각종 시위와 경찰과의 대치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결국 7월 한총련 사무실은 타대학으로 옮겨지게 된다. 우루과이라운드 비준 저지를 위해 기말고사가 연기 되는가 하면, 통일대축전 개최장소로 발표되면서 한양대 캠퍼스는 결코 조용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