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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식민과 전쟁의 역경을 딛고 성장한 교육의 꿈(1939~1958)= 한국 최초 고등기술교육기관인 한양대학교의 역사는 1939년 7월 1일 동아공과학원 설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산업기반의 구축만이 우리의 살길이라 굳게 믿은 김연준(金連俊) 선생의 줄기찬 집념의 소산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기승을 부리던 고난의 시절이었고,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세계공황의 선후책을 강구하느라 소용돌이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민족에 대한 민족차별과 노예적 동화를 근간으로 삼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은 한국인에 대한 고등기술교육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다. 타고난 음악적 재능으로 음악가의 길을 걷던 25세의 청년 김연준은 이처럼 치욕적인 민족의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기술교육’이라는 신념하에 1939년 7월 동아공과학원을 설립한다. 전통적으로 인문교육만을 중시해 왔던 우리의 역사를 뛰어넘어 ‘쟁이’를 기르기 위한 실용적 기술교육을 목표로, 체계적인 기술교육의 터전이 마련된 것은 이 학원이 최초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노력의 결실로서 천도교기념관에 자리 잡은 동아공과학원은 전임교사 13명, 강사 22명, 서기 2명, 용인 1명, 급사 2명의 진용을 갖추고 학생 630여 명을 모집하여 수업을 시작하였다. 오늘날 한양대학교의 전신인 동아공과학원 배움의 터전은 지금도 수운회관(前 천도교회관) 한 모퉁이에 남아 있어 스스로가 공학도의 산실로서의 구실을 다했음을 뚜렷하게 증언해 주고 있다. 실용적 기술교육의 시발점이 된 동아공과학원은 종로구 경운동 88번지 천도교 기념관에서 1939년 7월 1일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김연준은 동아공과학원 원장에 취임하여 자신의 4대 교육지침을 이 학원의 교육목표로 삼았다. 「勤勞好愛」「質實剛健」 「堅固持久」 「協調互讓」을 바탕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원만한 인격과 창조정신을 함양하자는 것이었다. 비록 체계는 잡히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근면·정직·겸손·봉사를 요구하는 오늘날 한양의 건학정신인 「사랑의 실천」의 근원이 되었다. 그 후 1942년 3월에는 동아고등공업학원을 새로이 설립, 토목과, 건축과 등 야간 3년제 2개 과에 100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종로구 신문로의 피어슨 성경학원에서 공업전문교육을 실시하였다. 수준 높은 고등기술교육 실시의 의도를 의심한 일제의 발악은 극에 달하였고, 끊임없는 미행과 감시뿐만 아니라 강의내용을 조사하고자 출두하기도 했다. 당시 총독부 학무국장은 김 원장에게 사퇴를 권고했고, 급기야 1942년 12월 전문학교로의 승격을 불허하였으며, 1943학년도 신입생 모집 중지령에 이어 수업 단축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배움에 목이 말라 모여드는 학생은 구름 같았지만 날로 심해져 가는 일제의 압제는 학원 기능을 마비시켰다. 결국 동아고등공업학원은 개교 2년 만인 1944년 3월 78명의 제1회 졸업생 배출과 함께 폐교하게 되었으며, 이어 9월에 동아공과학원도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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