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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5·16과 같은 격동기를 거쳐오면서 한양학원의 발전이 주춤하는 듯하였으나 1963년에 접어들면서 차츰 정상을 되찾기 시작했다. 폐지되었던 학과들이 복과되었으며 캠퍼스 시설 확충에도 한층 힘을 쏟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1969년 6월에는 현 학칙을 제정, 문교부로부터 승인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팽창하기 시작한 본 대학교의 규모는 부분적인 학과·정원의 조정이 계속되는 가운데 1960년대 후반에는 각 학과의 석·박사학위과정이 증설되고, 특수대학원으로 경영공과대학원이 신설되는 등 집중적인 증가·확대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970년 12월, 본 대학교는 마침내 8개 단과대학 44개 학과와 이부대학 9개 학과를 포용하는 대 한양의 모습을 과시하기에 이르렀다.
*1970년대에 이르자 이제 한양대학교는 외형적 조건의 완비와 더불어 연구·교육의 심화를 위한 내적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1970년대에 와서는 규모의 확장보다 내적 충실을 기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1973년부터 1978년까지 6년간 단 한 명의 입학 정원의 증원이 없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당시, 중동 건설진출이 활발한 시기에 일찍이 기술교육이 곧 기술보국(技術輔國)임을 깨달은 우리 대학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시기이기도 하였으나, 국가적으로는 외국건설 현장에 기술인력이 모두 빠져 나가는 바람에 기술 인력 부족 현상이 심화되는 시기이도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과 우리 대학의 상황이 ERICA캠퍼스의 필연적 탄생을 예고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당시, 정부에서는 수도권 인구 집중 억제책의 일환으로 서울 소재 대학의 지방 이전 및 지방분교 설립을 적극 권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반월 신공업 도시 건설에 맞추어 수립한 ‘수도권 인구 재배치 계획’ 속에 ‘서울 시내 사립 대학의 지방 이전 및 분교 설립시에는 증과(增科) 증원의 우선, 토지 수용상의 특례인정, 국공유지 불하에 편의 도모’등을 규정, 분교 설치에 대한 정부의 정책이 구체화 되었다. 반월 신공업 도시에 가장 적합한 분교를 설립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대학이 한양대학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서해안 시대의 중심대학으로, 국가 산업단지 발전의 밑거름이 되는 대학으로, 또한 국공립과 사립을 망라하여 전국에서 가장 많은 입학정원을 가진 종합대학으로 우뚝 서게 하는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의 출발이 1979년 5월 17일 그 첫 삽을 통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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