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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울지역 정원을 동결하여 발전에 애로가 많았던 사립대학의 경우 수도권 인구 재배치 계획은 발전의 계기를 열어주는데 호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이래 팽창 발전을 거듭해 오던 본 대학은 1970년대 초부터 그 성장 속도가 둔화된 채 내적 충실을 기하는 데만 주력해 온 바, 그것은 서울시의 인구증가 억제정책에 따라 학생 정원이 일체 증원될 수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본 대학의 신입학 모집인원이 1973년 이래 1978년까지 단 한 명도 증원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대학 발전에 중대한 장애 요인으로 대두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가 수도권에 과중하게 집중되어 있는 인구와 인구집중의 요인이 되고 있는 각종 기능 및 시설을 선별, 적정하게 배치하기 위해 반월신공업도시 건설과 관련하여 1977년에 수립 추진한 「수도권인구 재배치계획」으로 말미암아 수도권 소재 48개 대학교의 증원은 일체 억제당하게 되었다. 이에 우리 대학으로서도 장기 발전을 위한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분교설립 계획은 이러한 가운데 대두된 것이었다.
 
===분교 설립 인가 과정===
*1977년 말경 김연준 총장의 지시에 의해 제2캠퍼스 설립 계획을 착수하기는 했으나 아직 후보 지역도 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구체적 단계까지 진척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정부의 수도권 인구 재배치 계획에 따른 정부의 발표는 새로운 전기가 되어 주었다. 정부의 정책을 구체화하자 본 대학의 분교 설립 계획도 보다 활기를 띠었다. 분교 설립의 위치 선정 문제가 반월 지역으로 해결이 되면서 분교 설립 계획은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분교 설립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1978년 1월 중순, 본 대학 출신으로 당시 산업기지개발공사 부사장이던 이병칠 씨와 동 개발담당 이사인 전유석 씨로부터 “반월 신공업도시 건설 계획에 대학 설립 부지가 23만 평 가량 책정되어 있으니 그곳에 분교를 설립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가 있었고 곧바로 김연준 총장을 비롯한 당시 학교 간부들이 현지를 답사, ‘안산’으로 위치 결정을 보게 된 것이었다. 안산은 서울에서 통학 가능한 거리에 위치하면서도 수도권 범위에 제외되어 있어 분교 설립에 지극히 유리한 조건을 갖춘 지역이었으며, 정부의 안산 신공업 도시 건설 정책과 전통 깊은 공과대학을 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에 부응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지닌 우리 대학의 원대한 계획이 서로 합일되어짐으로써 그 본격적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분교 설립의 위치가 확정되자 설립계획은 급속히 추진되었다. 1978년 1월 24일 오전 10시 재단이사회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분교 설립의 건’을 토의, “반월지역에 공과대학 분교를 설치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동년 2월 6일에는 ‘고급기술인력 양성’과 ‘고등교육 인구의 서울 집중 현상 해결’을 목적으로 하는 ‘공과대학 반월분교 설치계획서’를 문교부에 제출(한법 제46호 공문)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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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립취지 및 목적 : 고등교육인구의 지역별 분산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반월 신공업도시 내에 반월 공과대학을 설치, 기계, 전자, 화공, 건설계열 등의 기술인력을 양성하여 국가 산업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함
 
2. 설치명칭 : 반월공과대학
 
3. 신청학과 및 정원 : 기계공학과 400명, 건축공학과 200명, 토목공학과 200명, 전자공학과 200명, 화학공학과 150명, 공업경영학과 100명. 합계 6개 학과 1,250명
 
4. 교원확보계획 : 308명(79년~82년 4년간 매년 77명씩 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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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년 2월 24일에 분교 설치에 따르는 교지 매입을 위한 추천을 문교부에 의뢰하였다(한법 제79호 공문). 이 때 우리 대학이 추천을 요청한 부지 위치와 면적은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반월 신공업도시 내 대학교 설치 부지 45만 평이었다.
*부지 확정 이후 김 총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분교설치 추진위원회’가 정식 발족되었다. 한편, 2월 6일자로 제출된 ‘공과대학 반월분교 설치계획서’를 심사한 문교부는 보완, 재제출을 지시하였고, 4월 15일자로 ‘교지매입 추천의뢰서’, ‘추정손익계산서’ 등을 첨부 일부 수정 보완된 설치계획서를 다음과 같이 재차 제출 신청하였다.
**#설립취지 및 목적 : 고등교육인구의 지역별 분산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반월 신공업도시 내에 반월 공과대학을 설치, 기계, 전자, 화공, 건설계열 등의 기술인력을 양성하여 국가 산업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함
**#설치명칭 : 반월공과대학
**#신청학과 및 정원 : 기계공학과 400명, 건축공학과 200명, 토목공학과 200명, 전자공학과 200명, 화학공학과 150명, 공업경영학과 100명. 합계 6개 학과 1,250명
**#교원확보계획 : 308명(79년~82년 4년간 매년 77명씩 충원)
*수정 보완된 설치 계획에 따르면 ‘공과대학 반월분교’는 ‘반월공과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신청학과 명칭도 1차 때의 산업공학과를 공업경영학과로, 정원도 공업경영학과에서 50명을 줄여 건축공학과를 200명으로 증원 조정하였으며, 교원확보 계획에 있어서도 110명에서 308명으로 대폭 증가하였고, 시설투자비 역시 1차에 비해 79억 1천 500여만 원이 증액되었다.
*그러나 분교 설립을 위해 이와 같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설립 계획을 신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문교부의 승인을 얻지 못한 채 1학기를 넘기게 된다. 이에 1979학년도부터 분교를 설치 운영할 예정이었던 우리 대학으로서는 분교의 사전 정지작업, 교사신축, 학생모집 등의 일정에 다소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1978년 10월 22일자(공문 대학 1040-1593)로 분교 설치계획이 승인되고, 1979년 3월 1일부터 개강할 것이 허가되었다. 그러나 설치학과 및 입학정원은 기계공학과 500명, 전자공학과 200명, 전기공학과 100명 총 3개학과 800명으로 축소 승인되었다. 더군다나 교육법과 동 시행령 및 대학설치 기준령이 정하는 시설 설비와 교직원, 그리고 학교법인의 수익용 기본재산을 기준액 이상 확보해야 한다는 조건부 승인이었으며, 이상의 조건을 이행한 후 1978년 12월 10일까지 분교 설립 인가를 다시 신청해야 하는 예비적 성격의 승인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지 매입에 관한 것이므로, 문교부에 재차 45만 평의 부지매입 추천의뢰를 하였다. 마침내 12월 11일 산업기지개발공사로부터 학교설립부지 42만 평에 대한 분양 가계약 체결 동의 요청을 해오게 되었고 이어 21일 가계약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도입 430-12.170, 한법 제556호 공문). 설립부지의 위치와 면적이 거의 확정되어 가는 것과 함께 우리 대학은 1978년 12월 9일 ‘한양학원 분교(반월공과대학) 설치인가 신청서’를 문교부에 정식 제출하였다(한법 제530호 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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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 목적 : 국제경쟁력에 대처할 수 있는 중화학공업 중심체제로의 산업구조개편에 따른 과학 고급기술인력을 양성하고 도시 고등교육인구의 집중화 현상 등을 해소, 지역 사회와 국가 발전에 공헌하고자 함
**#명칭 : 한양대학교 분교(반월공과대학)
**#위치 :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4리 전역(반월신공업도시내 대학교 설치부지 42만 평)
**#연차별 사업계획: [[한양학원 분교(반월공과대학) 설치인가 신청서/연차별 사업계획]] 참조
**#교원확보계획 : 145명(79년 46명, 80년~82년 매년 33명씩 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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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교 설치인가 신청서를 내면서 분교 명칭은 「반월공과대학」으로 확정되었고, 교지도 반월면 사리 전역으로 고정되었다. 개교·개강일까지 정해지고 보니 일정은 매우 촉박하게 되었다. 분교 개교에 따르는 제반 업무도 서둘러야 했으며, 분교 설립계획에 대한 승인이 지연되면서 부지 매입이 늦어짐에 따라 교사신축사업 부진 등으로 교육시설이 미처 갖추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선 신입생을 수용할 시설이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반월분교 신축공사기간인 79년도 1학기 동안은 불가피하게 서울캠퍼스 내에 임시 학생 수용대책을 강구해 문교부에 별도 제출하여 보고해야 했다(한법 제10호).
**“1979년 3월 분교 개교에 따른 학생을 수용하기 위한 연건평 2,000평의 대체 교사를 2월 말일까지 신축 완공하여 8월 31일까지 1학기 동안 수용하며, 이 기간의 실험실습은 본 대학교 이공계 학과의 실험실을 이용할 계획임.”
*[[파일:한양대학교 반월분교 설치 인가서.png|섬네일]]이에 따라 반월분교는 1979년 3월 신학기를 맞아 서울캠퍼스 제2교육관 4층에 산업경영대학원, 3층에 행정대학원과 함께 1, 2, 3층에 걸쳐 새로운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의 시대를 시작하게 되었다.
*1979년 1월, 마침내 반월분교 설립이 인가되었다. 문교부는 1월 10일자 공문(대학1040-110호)으로 한양대학교 반월분교 설치를 인가한 것이다.
*옆의 인가서는 그동안 42만 평의 설립 부지를 확보하는 등 분교 개교를 위한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 중에 법적으로 정식 인가된, 한양대학교의 새 역사의 장이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아공과학원 이래 한양대학교 개교 40년과 때맞추어 이루어진 분교 설립으로, 이제 한양대학교는 명실상부한 한국 최대의 종합대학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이룩하고, 이 나라의 발전과 나아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사랑의 실천’을 발휘할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당시 김연준 총장은 “신설분교를 미국의 메사추세츠공대(MIT)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포부를 밝혀 분교의 육성과 발전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반월분교의 첫 번째 신입생 입학시험은 1979년 1월 17일에 실시되었다. 3개 학과 800명을 선발했던 이 시험은 1월 12일까지 원서접수를 받고 16일 예비소집을 거쳐 17일 오전 10시 서울캠퍼스에서 실시되었다. 안산교정에서 실시되어야 할 시험은 문교부의 승인 지연으로 인한 캠퍼스 조성의 미비로 불가피한 것이었다. 79학년도 대학입학 예비고사 경기지구 합격자에 한해 실시된 첫 시험은 총 7,571명이 지원하여 평균 9.5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임으로써 안산캠퍼스의 앞날을 매우 밝게 하였다. 당시에 반월분교는 모두 공학계열의 학과뿐이었으므로, 공업계 고등학교 출신자를 선발하는 동계진학 모집을 일부 병행하여 정원의 10%는 동계 진학자로 1월 19일에 별도로 실시, 선발하였다.
===조직편성 및 교과과정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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