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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A40년사]] 중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안산캠퍼스의 설립배경과 과정설립 관련 내용입니다. = 설립배경과 과정=
==1970년대 경제적·사회적 상황==
*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의 붕괴와 그에 이은 민주당 정부에게 있어 화두는 기존 체계를 뛰어넘는 발전과 변화였다. 이에 민주당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게 되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계획만 남겨둔 채 군부세력에 의해 밀려나고 만다. 5·16 군사쿠데타에 이어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4·19혁명 이후 국민에 의한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했다는 데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박정희 군사정부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제개발에 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민주당 정권이 구상해 놓은 경제개발계획을 실행에 옮기지만, 중요한 것은 개발 비용이었다. 이를 위해 공화당 정부는 해외조달을 위해 국민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을 체결하게 되고 일본을 통해 7억불(무상 3억, 정부 2억, 민간 2억불)의 차관을 도입하게 된다. 이러한 차관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및 포항제철 준공 등에 쓰였다. 이와 같이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외화의 도입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또한 석유파동은 박정희 정부의 외화사정을 더욱 옥죄었다. 석유가 급등은 중동의 부를 축적해 주었고 오히려 우리나라에 중동 건설 특수를 가져왔다. 중동 건설 특수는 기술 인력의 유출로 인해 국내 기술 인력의 급격한 부족현상을 맞게 되었다.
{| class="wikitable"
|-
|1. 설치 목적 : |국제경쟁력에 대처할 수 있는 중화학공업 중심체제로의 산업구조개편에 따른 과학 고급기술인력을 양성하고 도시 고등교육인구의 집중화 현상 등을 해소, 지역 사회와 국가 발전에 공헌하고자 함|-|2. 명칭 : |한양대학교 분교(반월공과대학)|-|3. 위치 :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4리 전역(반월신공업도시내 대학교 설치부지 42만 평)|-|4. 연차별 사업계획 |(단위 : [[한양학원 분교(반월공과대학천원) 설치인가 신청서{| class="wikitable"|-!시설별/연차별 사업계획]] 참조!!계!!79년!!80년!!81년!!82년 이후|-|교육시설||7,246,720||1,246,720||1,144,000||1,144,000||3,767,806|-|교육지원시설||765,920||96,000||144,000||286,720||239,200|-|일반지원시설||2,112,000||336,000||576,000||240,000||960,000|-|총계||10,180,446||1,678,720||1,864,000||1,670,720||4,967,006|}|-|5. 교원확보계획|145명(79년 46명, 80년~82년 매년 33명씩 증원|}
5. 교원확보계획 : 145명(79년 46명, 80년~82년 매년 33명씩 증원
|}
*분교 설치인가 신청서를 내면서 분교 명칭은 「반월공과대학」으로 확정되었고, 교지도 반월면 사리 전역으로 고정되었다. 개교·개강일까지 정해지고 보니 일정은 매우 촉박하게 되었다. 분교 개교에 따르는 제반 업무도 서둘러야 했으며, 분교 설립계획에 대한 승인이 지연되면서 부지 매입이 늦어짐에 따라 교사신축사업 부진 등으로 교육시설이 미처 갖추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선 신입생을 수용할 시설이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반월분교 신축공사기간인 79년도 1학기 동안은 불가피하게 서울캠퍼스 내에 임시 학생 수용대책을 강구해 문교부에 별도 제출하여 보고해야 했다(한법 제10호).
“1979년 3월 분교 개교에 따른 학생을 수용하기 위한 연건평 2,000평의 대체 교사를 2월 말일까지 신축 완공하여 8월 31일까지 1학기 동안 수용하며, 이 기간의 실험실습은 본 대학교 이공계 학과의 실험실을 이용할 계획임.”
*위의 인가서는 그동안 42만 평의 설립 부지를 확보하는 등 분교 개교를 위한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 중에 법적으로 정식 인가된, 한양대학교의 새 역사의 장이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아공과학원 이래 한양대학교 개교 40년과 때맞추어 이루어진 분교 설립으로, 이제 한양대학교는 명실상부한 한국 최대의 종합대학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이룩하고, 이 나라의 발전과 나아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사랑의 실천’을 발휘할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당시 김연준 총장은 “신설분교를 미국의 메사추세츠공대(MIT)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포부를 밝혀 분교의 육성과 발전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반월분교의 첫 번째 신입생 입학시험은 1979년 1월 17일에 실시되었다. 3개 학과 800명을 선발했던 이 시험은 1월 12일까지 원서접수를 받고 16일 예비소집을 거쳐 17일 오전 10시 서울캠퍼스에서 실시되었다. 안산교정에서 실시되어야 할 시험은 문교부의 승인 지연으로 인한 캠퍼스 조성의 미비로 불가피한 것이었다. 79학년도 대학입학 예비고사 경기지구 합격자에 한해 실시된 첫 시험은 총 7,571명이 지원하여 평균 9.5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임으로써 안산캠퍼스의 앞날을 매우 밝게 하였다. 당시에 반월분교는 모두 공학계열의 학과뿐이었으므로, 공업계 고등학교 출신자를 선발하는 동계진학 모집을 일부 병행하여 정원의 10%는 동계 진학자로 1월 19일에 별도로 실시, 선발하였다.
 
===조직편성 및 교과과정 준비===
*신입생 선발과 한양대학교 학칙 변경을 완료하자, 이제 본격적인 개강을 위한 준비를 서둘러야했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은 분교 제반 학사업무를 담당해 나갈 조직의 편성이었다. 분교 개강에 따른 학사 및 일반 업무의 효율적이고도 원활한 운영을 위해 조직편성된 바를 표로써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파일:안산캠퍼스 조직편성안산캠퍼스_조직편성.png|섬네일테두리|안산캠퍼스 조직편성프레임없음|400x400픽셀]]
*그러나 조직편성은 안산캠퍼스로의 이전 전까지 분교의 학사, 일반업무를 임시 관리 운영하기 위한 단과대학 규모의 조직체계였고, 안산 이전 후로는 별도로 조직 운영이 계획되었다. 따라서 이전까지 모든 업무 총괄은 대학본부에서 담당하되 이전 후 운영을 위한 기본체제의 확립과 운영방안의 수립, 그리고 신입생의 면학을 위한 교무, 학생 및 총무업무의 운영은 모두 위의 조직편성체계에 의해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조직편성이 완료되면서 교과과정, 강의시간표, 강의계획서 작성 등 제반 준비가 진행되었다. 새로 창설되는 3개 학과는 서울캠퍼스 공과대학 소속 학과와 명칭이 동일하나 서울캠퍼스와 달리 안산캠퍼스 학과는 실험대학이 아닌 관계로 새로운 교과과정이 필요하였다. 전 교과는 필수 및 선택과목으로, 그리고 필수과목을 다시 일반교양필수과목과 전공필수과목으로 구분하고 일반교양 필수과목의 경우 공동 필수와 과별 필수과목으로 구분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class="wikitable"|-| 1. 공동 필수과목(숫자는 학점)*# 공동 필수과목 : ①국어(Ⅰ,Ⅱ):4, ②영어(Ⅰ,Ⅱ):10, ③군사교육:2, ④국민윤리:3, ⑤한국사:2, ⑥인문과학:2, ⑦사회과학:2, ⑧체육:2 - 계 27학점 2. *# 과별 필수과목 : ①물리:10, ②물리실험:2, ③공업수학:14, ④수치해석:2, ⑤화학:6, ⑥컴퓨터언어:2 - 36학점예시|}36학점
*여기서 영어(Ⅰ,Ⅱ)는 독본과 회화로 구분되고, 인문과학은 문화사, 철학개론 중 택일, 사회과학은 영어회화, 영어작문, 통계학 중 택일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물리는 Ⅰ,Ⅱ 및 2학년 물리로 구분되고, 공업 수학은 1, 2학년 4학기 동안에, 화학Ⅰ,Ⅱ와 컴퓨터 언어는 각각 1학년 과정에서 이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전공필수과목 및 전공선택과목은 각 학과의 특성에 따라 설정되었는데 학칙에 첨부된 각 학과의 전공관계 교과목은 아래의 표와 같다.**다음 [[안산캠퍼스 ERICA40년사/안산캠퍼스1979-1980/교과과정표(Ⅰ) (전공필수과목)]] 참조**[[안산캠퍼스 교과과정표(Ⅰ) (전공선택과목)]] 참조
*위의 교과목 중에서 교양과목은 각 학과 공통 70학점을, 전공필수과목은 기계공학과 70학점, 전자공학과 54학점, 전기공학과 64학점을, 그리고 전공선택과목은 기계공학과 20학점, 전자공학과 36학점, 전기공학과 26학점을 각각 이수하여 합계 160학점 취득을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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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학기 이수 학점은 12학점 이상 23학점 이하로 규정하여 1학년에서 35학점 이상, 2학년에서는 70학점 이상, 그리고 3학년에서는 110학점을 이수하여야 수료한 것으로 인정하기로 규정하였다.
*교과과정의 정비와 더불어 반편성이 이루어지고 반별 강의시간표 작성이 가능하게 되었다. 3개 학과 800명을 12개 학급(S1~S12)으로 편성, 새 캠퍼스로 이전할 때까지 임시 전용건물로 서울캠퍼스의 제2교육관을 개수, 특별 배치하였다. 1층은 실험준비실, 2, 3층은 강의실과 교수연구실, 4층은 휴게실과 도서실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한편 강의와 학생지도를 담당할 교수진도 1차 확보되어 3개 학과에 18명(교수 1, 부교수 7, 조교수 3, 전임강사 7)의 전임교원이 배속되었으며 이후 연차적으로 충원키로 계획하였다.
 
===안산캠퍼스 조성사업과 기공식 거행===
*이로써 신입생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가 완료되었고, 강의 등 제반 학사업무가 순조롭게 진행되자 추후 이전을 대비한 안산캠퍼스 조성사업에 주력하였다. 79년도 2학기 이전을 전제로 8월 31일까지 우선 800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완료해야만 했고, 이를 위해 학교부지 조성, 교사신축 등을 조속히 착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어 1979년 4월 1일에는 분교 건설에 따른 효율적 운용을 도모하기 위해 분교 건설 추진위원회 보강을 위한 임원 선임이 이루어졌는데, 이를 통해 개편된 기구와 임원은 다음과 같다.
 *[[파일:반월분교 건설 추진위원회반월분교_건설_추진위원회.jpg|섬네일테두리|반월분교 건설 추진위원회프레임없음|617x617픽셀]]
*1979년 3월 23일 건설부장관으로부터 반월 신공업도시 대지분양기준 승인을 얻은 산업기지개발공사가 3월 29일자로 학교부지 매매계약 체결 동의요청을 해오게 되었고(도입 430-2945), 우리대학은 이에 동의(한법 제136호), 3월 31일 마침내 반월신공업도시 녹지지역 내 42만 평에 대한 부지 매매계약이 정식 체결되었다. 부지 매매계약 체결이 완결되자 우리 대학은 서둘러 4월부터 분교 신축공사에 착공코자 공사추진에 따른 업무협조공문을 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한법 제138호)과 동 반월현장소장 앞으로 동시에 발송, 협조를 의뢰하였고, 5월 8일 산업기지개발공사로부터 분교설립부지에 대한 토지사용 승낙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5월 17일 금요일 오후 2시, 마침내 역사적인 안산캠퍼스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기공식이 있는 오전, 교사건축 허가도 나와 기공식과 동시에 건축공사를 위한 정지공사에 착수하였다. 바야흐로 서해안 시대에 그 한복판 광활한 대지 위에서 내외 귀빈들의 축복속에 거행된 이 기공식이야말로 개교 40주년을 맞은 한양학원 최대의 경사요, 새로운 도약의 신기원이 이룩되는 순간이었다. 기공 당시 첫 입학생이 4학년이 되는 82학년도를 완성년도로 잡은 1차 안산캠퍼스 설치계획에 따르면, 기초교육관(과제도서실, 식당 포함) 4,317평과 교지정지공사 5,000평을 8월 31일까지 완료하고, 본부 건물(3,300평)과 정지공사 10,000평(체육장 포함)을 12월 31일까지 완료하며, 80년도 전반기에 부속공장과 동력실, 후반기에 기숙사 1차 공사를, 81년도에 종합도서관(7,600평), 82년도에 기숙사 2차 공사와 강당(2,400평), 학생회관(2,100평)을 완공키로 계획하였다.
*이와 같은 진행과정에서 1979년 9월 80학년도 ‘전국대학 입학정원 조정’ 결과 80학년도 본 대학교의 입학정원이 700명 증원되었는데 이 가운데 500명이 반월분교에 배당되었다. 이로써 반월분교는 기존의 3개 학과 800명에서 금속재료공학과 100명, 산업공학과 80명, 영어영문학과, 일어일문학과, 독어독문학과, 불어불문학과 각 40명, 경제학과, 경영학과, 무역학과, 회계학과 각 40명씩 500명이 증원되어 1,300명의 규모가 되었다. 당초 공과대학 반월분교 형식으로 출발한 안산캠퍼스는 그동안 반월분교, 반월공대 또는 반월대학으로 불렸으나, 이제 13개 학과 3개 계열로서 종합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규모도 커졌으므로 명칭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1983년 이후 ‘한양대학교 반월캠퍼스’를 정식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이에 따라 편제도 다음과 같이 개편되었다.
[[파일:1983년 반월캠퍼스 편제 개편1983년_반월캠퍼스_편제_개편.jpg|섬네일테두리|1983년 반월캠퍼스 편제 개편프레임없음|616x616픽셀]]
= 안산캠퍼스의 원년 =
*1980년 2월 5일 3개 계열 13개 학과로 종합대학의 면모를 갖추고 첫 입학시험이 실시되었다. 사실상 안산캠퍼스의 첫 주인공이 될 1,300명을 선발하는 본 입시에는 2,652명이 지원, 평균 2.1대 1의 경쟁률을 나타냈는데, 특히 이번 입시는 3개 계열 13개 학과에 대한 것으로 종합캠퍼스로서의 시발을 의미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캠퍼스 조성 마무리가 채 안되었으므로 3월 5일 입학식에 이어 실시된 4일간의 오리엔테이션은 서울캠퍼스에서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모습을 드러낸 교사는 안산캠퍼스 기초교육관 A동(지하 1층, 지상 4층, 현재 제1과학기술관)과 기초교육관 C동(지하 1층, 지상 4층, 현재 실용영어교육관), 학생회관 식당동(지상 2층, 현재 학생복지관 식당동)이다. 기초교육관 A동은 연건평 3,010평 건물로, 본부 건물 완성 때까지 학장실, 교무과, 학생과, 총무과 등의 부서와 교수연구실, 강의실, 물리실험실 및 준비실, 화학실험실 및 재료준비실, 그리고 참고도서실로 사용되며, C동은 745평으로 교수실과 어학실습실, 회의실이 배정되었다. 기초교육관 A동에 임시로 개관한 도서관은 120석 규모의 좌석과 동양서적 4,159권, 서양서적 6,359권 총 10,518권의 장서를 보유하여 현재와 비교하면 다소 초라하지만 대학교의 모습을 하나하나 갖추어 나가며 정식 개관을 기대케 하였다. 기초교육관 B동(현재 제1학술관)도 함께 준공 예정이었으나 혹한과 열악한 도로사정 등으로 인해 공사에 지장이 초래되어 다소 연기되어 6월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로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기본적인 교사가 완공된 후 동년 3월 17일 1교시부터 강의가 시작되었고, 새 캠퍼스로의 본격적인 이전은 3월 20일에 단행되었다. 부산하면서도 신선미 넘치는 희망 가득 찬 출발이었다.
 
[[분류:ERICA4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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