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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골반이 붙은 채 태어난 쌍생아를 분리하는 수술 국내 최초 성공
** 한국인 태아 식음자료 연구 결과 국내 최초 완성 발표
 
* 실천하는 교수의 모습 : 치열한 현장을 함께하는 교수님들이 있었다. 인문대 교수 20여명은 교내 대자보를 통해 당시의 학생운동을 비판하는 입장을 발표해 학생들이 바로 갈 수 있도록 스승의 역할을 했으며, 고영수 교수는 소비자안전을 위해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법정 소송에 휘말렸지만 무죄판결을 받으면서 그해의 소비자뉴스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공음대 교수의 유족은 고인의 뜻을 받들어 시신과 전재산 3억여원을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 기증해 감동을 줬다.
 
* 중장기 발전 계획으로 '한발 먼저' : 대학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시도는 대학 최초 '중장기 발전계획' 수립으로부터 시작했다. 그해 1월 삼성경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시작된 이 작업은 10월에 공식 선포되면서 각종 대학 개혁의 제도들이 도입되도록 했다. 또한, 미국 우주항공기업인 그라만社와의 산학협력 체결은 국내 대학이 외국기업과 맺은 최초의 협약으로 기록됐다. 대학 최초 산학협력단을 만들고 최근에는 기술이전실적 1위에 오른 한양대의 저력이 시작된 해라 할 수 있다. 이런 대학의 선도적인 활동은 취업시장에서도 나타나 기업들의 채용선호도 조사에서 당당히 1위를 했다.
 
* 대학가 기류는 '실용학풍' : 94년 대학가는 '실용학풍'의 기류가 확산되고 있었다. 컴퓨터나 외국어 능력이 재학중은 무론 취업시에도 반영되도록 여러 제도가 생겨났다. 어학연수가 학점으로 인정되고 영어강의제가 실시되기도 했다. 학부생도 교비로 해외유학이 가능하도록 기회가 열렸고, 학사관리가 대폭 강화된 해로 기록되어 있다. 강의실내 흡연도 그때부터 금지됐다. 인터넷 시대를 열면서 5월에 한양대학교 홈페이지가 개설되었다.
 
…그리고, 역사 속 한양대'''
 
"1994년, 그해 한양대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개교 55주년을 맞이하던 그때. 총장은 제8대 김종량 총장이었고,
 
대학 정원은 학부 5610명, 대학원 2635명이었다.
 
한양인의 삶과 문화 그리고 이야기가 있었다. 처음 대학종합평가가 이루어진 1994년. 대학동문카드의 인기가 뜨거웠던 1994년. 수많은 외국 대학들과 자매결연을 ㅐㅁㅈ으며 글로벌화의 큰 걸음을 내딛었던 1994년. 1400여명의 학생이 추석 귀향버스를 타기 위해 한마당에 모이던 1994년. 농활이 한양대에서 국내 최초 학점으로 인정되던 1994년. 역사와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양의 1994년은 지금도 우리에게 응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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