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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적 기술교육의 시발점이 된 동아공과학원은 종로구 경운동 88번지 천도교 기념관에서 1939년 7월 1일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김연준은 동아공과학원 원장에 취임하여 자신의 4대 교육지침을 이 학원의 교육목표로 삼았다. 「勤勞好愛」「質實剛健」 「堅固持久」 「協調互讓」을 바탕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원만한 인격과 창조정신을 함양하자는 것이었다. 비록 체계는 잡히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근면·정직·겸손·봉사를 요구하는 오늘날 한양의 건학정신인 「사랑의 실천」의 근원이 되었다. 그 후 1942년 3월에는 동아고등공업학원을 새로이 설립, 토목과, 건축과 등 야간 3년제 2개 과에 100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종로구 신문로의 피어슨 성경학원에서 공업전문교육을 실시하였다. 수준 높은 고등기술교육 실시의 의도를 의심한 일제의 발악은 극에 달하였고, 끊임없는 미행과 감시뿐만 아니라 강의내용을 조사하고자 출두하기도 했다. 당시 총독부 학무국장은 김 원장에게 사퇴를 권고했고, 급기야 1942년 12월 전문학교로의 승격을 불허하였으며, 1943학년도 신입생 모집 중지령에 이어 수업 단축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배움에 목이 말라 모여드는 학생은 구름 같았지만 날로 심해져 가는 일제의 압제는 학원 기능을 마비시켰다. 결국 동아고등공업학원은 개교 2년 만인 1944년 3월 78명의 제1회 졸업생 배출과 함께 폐교하게 되었으며, 이어 9월에 동아공과학원도 문을 닫았다.
*일제 말기에 폐교 처분되었던 동아고등공업학원은 1945년 8월 15일 민족해방과 함께 ‘건국기술학교’로 거듭난다. 1945년 9월에 설립된 건국기술학교 전문부는 야간 3년제로 종로구 신문로의 피어슨 성경학원에서, 야간 2년제인 중등부는 종로구 수송동 수송전기학교에서 토목과, 건축과 등 2개 과로 개교하였으며 이는 현재 한양의 초석이자 본격적인 고등기술교육의 시작점이었다. 동교는 민족의 해방을 맞은 32세 청년 김연준이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기술·과학·공업에 걸어야한다는 선견지명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한 기술고등교육 사업이라는 점에 그 큰 뜻이 있다. 1945년 9월에 설립되어 1947년 12월, 동교가 ‘한양야간공업대학관’으로 승격되기까지 2년 2개월간 존속하였다.
*교과과정이나 교과목 편성은 확정적일 수 없었다. 전공과목과 담당 교사의 사정,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군정청 문교방침 및 정책의 빈번한 변경, 기술에 대한 사회적 요청에 따라 수시로 변경되기도 했다. 학생의 연령은 20대에서 40대까지 고르지 않았고, 대부분의 학생은 직업인이자 생활인이었던 까닭에 동일성을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뜨거운 향학심만은 한결같았다. 거의 반세기에 걸쳤던 일본의 간섭과 통치가 끝남과 동시에 이 민족사회에 억눌렸던 교육열이 폭발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해방된 민족 국가가 요구하는 기술을 가르치려는 교사들의 열정도 대단했으며, 학생들에게 있어서 공부는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할 수가 없는 나라 사랑의 길이었다. 민족광복의 기쁨 속에서 태어난 건국기술학교는 해방 직후의 혼란과 격동 속에서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는 사이에 오히려 그 뿌리를 튼튼하게 대지에 내려 마침내 한양대학교라는 무성한 나무로 자라갔자라갔다.
*1946년 5월, 건국기술학교의 김연준 교장은 본격적인 교육사업을 위해 사재를 털어 재단법인 한양학원을 설립하였다. 소화공과학교를 인수한 후 건국기술학교의 중등부와 병합, 한양공업학교를 설립하여 신당동 251번지에서 개교하였으며, 중등부를 분리시킨 건국기술학교는 1946년 8월 건국기술전문학교로 개명하고 1946년 12월 교사를 신당동 251번지로 이전하였다. 한양공업학교를 설립하고 재단법인 한양학원이 창설된 뒤 학원의 핵심은 자연 건국기술학교와 한양공업학교가 되었다. 한양학원의 착실한 내실강화에 따라 건국기술학교는 1947년 12월에 문교부로부터 한양야간공업대학관으로 정식 승격 인가를 받았다. 이는 일제치하의 험난했던 발전과정이 마침내 정규대학으로 탈바꿈하는 선행적인 단계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으며 한양의 역사에서 하나의 큰 분수령적 의의를 갖는 시기인 것이다. 한양공업대학관은 건국기술전문학교에서 계승된 토목, 건축, 전기, 기계 등 야간 2년제 4개 학과의 모습을 갖추었다. 건국기술학교와 한양공업대학관으로 이어지는 정규 대학 설립의 열망은 1948년 7월 1일 한양공과대학 설립 인가(文高發 제114호)를 통해 결실을 맺는다. 한양공과대학은 주간과정의 전기공학과(정원 200명), 기계공학과(정원 200명)와 야간과정의 토목공학과(정원200명), 건축공학과(정원 200명), 전기공학과(정원 200명), 기계공학과(정원 200명)로 출발하였으며 초대 학장에 김연준 박사가 취임하였다. 1948년 8월 ‘조선교육의 근본이념인 민주국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출발한 한양공과대학은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1939년 건학 이래 일제의 탄압에 짓눌려 펼 수 없었던 ‘국가의 동량으로서의 과학기술자 양성’이라는 본교의 오랜 건학정신이 8·15 민족해방, 그리고 대한민국 창건이라는 새로운 여건에 따라 본격적으로 펼쳐나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동아공과학원이 설립된 지 20년 만에 우리나라 유일의 4년제 정규 민립 공과대학으로 한양의 역사는 다시 시작하였다. 1949년 9월 대학 설립 이후 야간과정이던 토목공학과, 건축공학과를 주간학과로 전환하고 야간학과인 전기공학과와 기계공학과의 수업연한은 2년으로 단축하였다. 1950년 4월에 주간 및 야간에 공업화학과를 신설하고 2년제 야간학부를 4년제 초급대학으로 개편하였으며, 공업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2년제인 부설 중등교원양성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학원의 기틀이 미처 잡히기도 전인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학교시설이 많이 파괴되었고 교수와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전쟁의 참화 속에서 꽃다운 생명들을 잃어야 했다. 그렇지만 일제말의 혹독한 감시 속에서도 불씨를 지켜온 본교의 건학정신은 전란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다시 재연되었다. 1951년 6월 부산시 완월동 2가 51번지에서 천막 및 가교사를 마련하여 수업을 계속하였으며, 1951년 12월 광산과를 신설하였다. 1952년 3월 토목공학과 32명, 건축공학과 26명, 기계공학과 54명, 전기공학과 44명 등 모두 156명의 한양공과대학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1953년 3월에는 대학원 설립 인가를 받고 전기공학과(정원 3명), 기계공학과(정원 3명), 화학공학과(정원 3명) 등 3개 학과를 설치하였다. 6·25 전쟁은 여러 차례의 극적인 전환을 거치면서 발발된지 만 3년만인 1953년 7월에 휴전으로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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