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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경제적·사회적 상황

  •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의 붕괴와 그에 이은 민주당 정부에게 있어 화두는 기존 체계를 뛰어넘는 발전과 변화였다. 이에 민주당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게 되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계획만 남겨둔 채 군부세력에 의해 밀려나고 만다. 5·16 군사쿠데타에 이어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4·19혁명 이후 국민에 의한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했다는 데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박정희 군사정부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제개발에 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민주당 정권이 구상해 놓은 경제개발계획을 실행에 옮기지만, 중요한 것은 개발 비용이었다. 이를 위해 공화당 정부는 해외조달을 위해 국민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을 체결하게 되고 일본을 통해 7억불(무상 3억, 정부 2억, 민간 2억불)의 차관을 도입하게 된다. 이러한 차관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및 포항제철 준공 등에 쓰였다. 이와 같이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외화의 도입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또한 석유파동은 박정희 정부의 외화사정을 더욱 옥죄었다. 석유가 급등은 중동의 부를 축적해 주었고 오히려 우리나라에 중동 건설 특수를 가져왔다. 중동 건설 특수는 기술 인력의 유출로 인해 국내 기술 인력의 급격한 부족현상을 맞게 되었다.
  • 박정희 정권 초기 수도권 및 구미, 마산 등을 거점으로 한 개발계획은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개발계획으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이로 인해 유휴노동력이 있던 농촌에서는 도시로의 이동을 시작하게 된다. 수도권 인구집중은 정부의 재정금융정책도 한몫을 하였다. 재정금융정책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금융기관이 수도권에 집중하게 되고 기업의 입장에서는 사무직 종사자들을 수도권에 집중시키는 것이 이윤을 극대화하고 비용을 극소화하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는 사무직종의 일자리를 수도권에 집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수도권은 지방에 비해 교육의 기회가 많았다. 주요 유수의 대학이 서울에 집중해 있었기 때문에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서울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각종 문화적, 오락적인 혜택 역시 수도권이 지방에 비해 월등히 나았다. 이로 인해 수도권은 노동력의 수요보다 공급이 늘어나는 공급과잉이 되고 이로 인해 수도권 인구는 급팽창하였으며 농촌의 인구는 급감하였다. 수도권 인구집중은 지방의 황폐화와 인구 집중으로 인한 수도권의 삶의 질 저하 문제, 부동산 초과수요에 따른 가격 급등과 투기의 악순환 등을 낳았다.

안산캠퍼스 설립배경과 준비

시대적 난제 속에서 발견한 분교의 가능성

  • 본 대학의 설립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급속한 성장으로 인한 사회적 부작용의 대안으로 모색된 바가 크다. 다시 말해 거점을 중심으로 한 경제 발전 정책이 지역 균등 발전을 통해 산업의 집중과 인구의 과밀 현상이라는 사회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 대한 최선의 방책으로 정부는 수도권 외곽에 산업시설을 설치함으로써 수도권 지역의 산업을 이전하고 수도권 인구도 아울러 분산시키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 대학의 발전은 그것이 존재하는 국가사회의 발전과 궤(軌)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는 바,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가 안산 지역(당시 행정구역명 ‘반월’)에 자리잡게 된 것도 실은 ‘반월’(뒤에 안산으로 명칭 변경) 신공업도시 건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 당시 ‘반월신공업단지’는 수도권 인구 분산책의 하나로 서울과 경기도에 산재한 중소기업 공장들을 반월 지역으로 이전하여 효율성을 높이고 계열화하여 육성할 목적으로 1977년 착공된 공업단지이다. 아울러 배후 도시를 개발하여 서울 유입인구를 이곳으로 유도하여 국토의 균형적 개발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 당시 정부는 수도권 인구 유입을 분산시키고 국토의 균형적 개발을 위해 발표한 수도권 인구 재배치 계획은 주요 경제 SOC의 지역 분산과 정부 기구의 지역 배치, 교육제도 개편을 통한 지역 분산이었다. 특히 대학 이전과 분산을 당시 언론 기사(동아일보 1977년 4월 4일자)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전, 합병 및 분교 설립을 지원하고 사립대에 대해 지방으로 옮길 경우 증과, 학생 증원 등 행정지원과 아울러 학교 부지 선정에 있어서도 정부가 국유지 불하 등 적지에 선정해주고 현행 토지수용법상의 특례 조치로써 이들 대학의 이전 대상 토지를 토지수용법 규정에 의해 강제로 매수, 소요 부지를 확보해 주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이들 사립대에 대해서는 교육차관을 알선해 주고 장기 저리 융자 등 재정지원책도 강구해 줄 방침이다. 건실한 사립대학이 반월 신도시나 5대 거점도시 주변 등 남부지역 인구 수용권에다 지방분교를 설치하려 할 경우 분교 설립을 적극 권장하고 이전과 똑같은 지원혜택을 주기로 했다.」
  • 당시 서울지역 정원을 동결하여 발전에 애로가 많았던 사립대학의 경우 수도권 인구 재배치 계획은 발전의 계기를 열어주는데 호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이래 팽창 발전을 거듭해 오던 본 대학은 1970년대 초부터 그 성장 속도가 둔화된 채 내적 충실을 기하는 데만 주력해 온 바, 그것은 서울시의 인구증가 억제정책에 따라 학생 정원이 일체 증원될 수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본 대학의 신입학 모집인원이 1973년 이래 1978년까지 단 한 명도 증원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대학 발전에 중대한 장애 요인으로 대두되었던 것이다.
  • 뿐만 아니라 정부가 수도권에 과중하게 집중되어 있는 인구와 인구집중의 요인이 되고 있는 각종 기능 및 시설을 선별, 적정하게 배치하기 위해 반월신공업도시 건설과 관련하여 1977년에 수립 추진한 「수도권인구 재배치계획」으로 말미암아 수도권 소재 48개 대학교의 증원은 일체 억제당하게 되었다. 이에 우리 대학으로서도 장기 발전을 위한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분교설립 계획은 이러한 가운데 대두된 것이었다.

분교 설립 인가 과정

  • 1977년 말경 김연준 총장의 지시에 의해 제2캠퍼스 설립 계획을 착수하기는 했으나 아직 후보 지역도 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구체적 단계까지 진척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정부의 수도권 인구 재배치 계획에 따른 정부의 발표는 새로운 전기가 되어 주었다. 정부의 정책을 구체화하자 본 대학의 분교 설립 계획도 보다 활기를 띠었다. 분교 설립의 위치 선정 문제가 반월 지역으로 해결이 되면서 분교 설립 계획은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 분교 설립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1978년 1월 중순, 본 대학 출신으로 당시 산업기지개발공사 부사장이던 이병칠 씨와 동 개발담당 이사인 전유석 씨로부터 “반월 신공업도시 건설 계획에 대학 설립 부지가 23만 평 가량 책정되어 있으니 그곳에 분교를 설립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가 있었고 곧바로 김연준 총장을 비롯한 당시 학교 간부들이 현지를 답사, ‘안산’으로 위치 결정을 보게 된 것이었다. 안산은 서울에서 통학 가능한 거리에 위치하면서도 수도권 범위에 제외되어 있어 분교 설립에 지극히 유리한 조건을 갖춘 지역이었으며, 정부의 안산 신공업 도시 건설 정책과 전통 깊은 공과대학을 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에 부응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지닌 우리 대학의 원대한 계획이 서로 합일되어짐으로써 그 본격적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 분교 설립의 위치가 확정되자 설립계획은 급속히 추진되었다. 1978년 1월 24일 오전 10시 재단 이사회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분교 설립의 건’을 토의, “반월지역에 공과대학 분교를 설치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동년 2월 6일에는 ‘고급기술인력 양성’과 ‘고등교육 인구의 서울 집중 현상 해결’을 목적으로 하는 ‘공과대학 반월분교 설치계획서’를 문교부에 제출(한법 제46호 공문)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설치 신청학과 및 정원 : 기계공학과 400명, 건축공학과 150명, 토목공학과 200명, 전자공학과 200명, 화학공학과 150명, 산업공학과 150명. 합계 6개학과 1,250명

2. 연차별 교원확보계획 : 1979년도 86명, 80년도 8명, 81년도 8명, 82년도 8명 도합 4년간 110명

3. 소요예산

① 교지구입 및 외곽공사비 13억6천만 원

② 시설투자비 : 합계 75억1천6백만 원(교육시설비 53억8천만 원, 교육지원시설비 6억8천 8백만 원, 일반지원시설비 14억4천8백만 원)

총합계 88억7천6백만 원

4. 재원확보계획 : 자체부담 23억7천6백만 원, 차관 50억 원, 무상원조 15억 원

합계 88억7천6백만 원

  • 그리고 동년 2월 24일에 분교 설치에 따르는 교지 매입을 위한 추천을 문교부에 의뢰하였다(한법 제79호 공문). 이 때 우리 대학이 추천을 요청한 부지 위치와 면적은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반월 신공업도시 내 대학교 설치 부지 45만 평이었다.
  • 부지 확정 이후 김 총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분교설치 추진위원회’가 정식 발족되었다. 한편, 2월 6일자로 제출된 ‘공과대학 반월분교 설치계획서’를 심사한 문교부는 보완, 재제출을 지시하였고, 4월 15일자로 ‘교지매입 추천의뢰서’, ‘추정손익계산서’ 등을 첨부 일부 수정 보완된 설치계획서를 다음과 같이 재차 제출 신청하였다.
1. 설립취지 및 목적 : 고등교육인구의 지역별 분산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반월 신공업도시 내에 반월 공과대학을 설치, 기계, 전자, 화공, 건설계열 등의 기술인력을 양성하여 국가 산업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함

2. 설치명칭 : 반월공과대학

3. 신청학과 및 정원 : 기계공학과 400명, 건축공학과 200명, 토목공학과 200명, 전자공학과 200명, 화학공학과 150명, 공업경영학과 100명. 합계 6개 학과 1,250명

4. 교원확보계획 : 308명(79년~82년 4년간 매년 77명씩 충원)

  • 수정 보완된 설치 계획에 따르면 ‘공과대학 반월분교’는 ‘반월공과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신청학과 명칭도 1차 때의 산업공학과를 공업경영학과로, 정원도 공업경영학과에서 50명을 줄여 건축공학과를 200명으로 증원 조정하였으며, 교원확보 계획에 있어서도 110명에서 308명으로 대폭 증가하였고, 시설투자비 역시 1차에 비해 79억 1천 500여만 원이 증액되었다.
  • 그러나 분교 설립을 위해 이와 같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설립 계획을 신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문교부의 승인을 얻지 못한 채 1학기를 넘기게 된다. 이에 1979학년도부터 분교를 설치 운영할 예정이었던 우리 대학으로서는 분교의 사전 정지작업, 교사신축, 학생모집 등의 일정에 다소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 마침내 1978년 10월 22일자(공문 대학 1040-1593)로 분교 설치계획이 승인되고, 1979년 3월 1일부터 개강할 것이 허가되었다. 그러나 설치학과 및 입학정원은 기계공학과 500명, 전자공학과 200명, 전기공학과 100명 총 3개학과 800명으로 축소 승인되었다. 더군다나 교육법과 동 시행령 및 대학설치 기준령이 정하는 시설 설비와 교직원, 그리고 학교법인의 수익용 기본재산을 기준액 이상 확보해야 한다는 조건부 승인이었으며, 이상의 조건을 이행한 후 1978년 12월 10일까지 분교 설립 인가를 다시 신청해야 하는 예비적 성격의 승인이었다.
  •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지 매입에 관한 것이므로, 문교부에 재차 45만 평의 부지매입 추천의뢰를 하였다. 마침내 12월 11일 산업기지개발공사로부터 학교설립부지 42만 평에 대한 분양 가계약 체결 동의 요청을 해오게 되었고 이어 21일 가계약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도입 430-12.170, 한법 제556호 공문). 설립부지의 위치와 면적이 거의 확정되어 가는 것과 함께 우리 대학은 1978년 12월 9일 ‘한양학원 분교(반월공과대학) 설치인가 신청서’를 문교부에 정식 제출하였다(한법 제530호 공문).
예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