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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위치 :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4리 전역(반월신공업도시내 대학교 설치부지 42만 평)
4. 연차별 사업계획 : 아래 '연차별 사업계획' 참조 [[한양학원 분교(반월공과대학) 설치인가 신청서/연차별 사업계획]] 참조
5. 교원확보계획 : 145명(79년 46명, 80년~82년 매년 33명씩 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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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학원 분교(반월공과대학) 설치인가 신청서 - '연차별 사업계획' (단위 : 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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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79년!!80년!!81년!!82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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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시설||7,246,720||1,246,720||1,144,000||1,144,000||3,767,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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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지원시설||765,920||96,000||144,000||286,720||23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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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지원시설||2,112,000||336,000||576,000||240,000||960,000
|-
|총계||10,180,446||1,678,720||1,864,000||1,670,720||4,967,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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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교 설치인가 신청서를 내면서 분교 명칭은 「반월공과대학」으로 확정되었고, 교지도 반월면 사리 전역으로 고정되었다. 개교·개강일까지 정해지고 보니 일정은 매우 촉박하게 되었다. 분교 개교에 따르는 제반 업무도 서둘러야 했으며, 분교 설립계획에 대한 승인이 지연되면서 부지 매입이 늦어짐에 따라 교사신축사업 부진 등으로 교육시설이 미처 갖추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선 신입생을 수용할 시설이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반월분교 신축공사기간인 79년도 1학기 동안은 불가피하게 서울캠퍼스 내에 임시 학생 수용대책을 강구해 문교부에 별도 제출하여 보고해야 했다(한법 제10호).
“1979년 3월 분교 개교에 따른 학생을 수용하기 위한 연건평 2,000평의 대체 교사를 2월 말일까지 신축 완공하여 8월 31일까지 1학기 동안 수용하며, 이 기간의 실험실습은 본 대학교 이공계 학과의 실험실을 이용할 계획임.”
*위의 인가서는 그동안 42만 평의 설립 부지를 확보하는 등 분교 개교를 위한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 중에 법적으로 정식 인가된, 한양대학교의 새 역사의 장이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아공과학원 이래 한양대학교 개교 40년과 때맞추어 이루어진 분교 설립으로, 이제 한양대학교는 명실상부한 한국 최대의 종합대학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이룩하고, 이 나라의 발전과 나아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사랑의 실천’을 발휘할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당시 김연준 총장은 “신설분교를 미국의 메사추세츠공대(MIT)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포부를 밝혀 분교의 육성과 발전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반월분교의 첫 번째 신입생 입학시험은 1979년 1월 17일에 실시되었다. 3개 학과 800명을 선발했던 이 시험은 1월 12일까지 원서접수를 받고 16일 예비소집을 거쳐 17일 오전 10시 서울캠퍼스에서 실시되었다. 안산교정에서 실시되어야 할 시험은 문교부의 승인 지연으로 인한 캠퍼스 조성의 미비로 불가피한 것이었다. 79학년도 대학입학 예비고사 경기지구 합격자에 한해 실시된 첫 시험은 총 7,571명이 지원하여 평균 9.5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임으로써 안산캠퍼스의 앞날을 매우 밝게 하였다. 당시에 반월분교는 모두 공학계열의 학과뿐이었으므로, 공업계 고등학교 출신자를 선발하는 동계진학 모집을 일부 병행하여 정원의 10%는 동계 진학자로 1월 19일에 별도로 실시, 선발하였다.
 
===조직편성 및 교과과정 준비===
*신입생 선발과 한양대학교 학칙 변경을 완료하자, 이제 본격적인 개강을 위한 준비를 서둘러야했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은 분교 제반 학사업무를 담당해 나갈 조직의 편성이었다. 분교 개강에 따른 학사 및 일반 업무의 효율적이고도 원활한 운영을 위해 조직편성된 바를 표로써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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