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CA40년사/안산캠퍼스1979-1980
1. 1970년대 경제적·사회적 상황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의 붕괴와 그에 이은 민주당 정부에게 있어 화두는 기존 체계를 뛰어넘는 발전과 변화였다. 이에 민주당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게 되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계획만 남겨둔 채 군부세력에 의해 밀려나고 만다. 5·16 군사쿠데타에 이어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4·19혁명 이후 국민에 의한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했다는 데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박정희 군사정부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제개발에 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민주당 정권이 구상해 놓은 경제개발계획을 실행에 옮기지만, 중요한 것은 개발 비용이었다. 이를 위해 공화당 정부는 해외조달을 위해 국민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을 체결하게 되고 일본을 통해 7억불(무상 3억, 정부 2억, 민간 2억불)의 차관을 도입하게 된다. 이러한 차관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및 포항제철 준공 등에 쓰였다. 이와 같이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외화의 도입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또한 석유파동은 박정희 정부의 외화사정을 더욱 옥죄었다. 석유가 급등은 중동의 부를 축적해 주었고 오히려 우리나라에 중동 건설 특수를 가져왔다. 중동 건설 특수는 기술 인력의 유출로 인해 국내 기술 인력의 급격한 부족현상을 맞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초기 수도권 및 구미, 마산 등을 거점으로 한 개발계획은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개발계획으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이로 인해 유휴노동력이 있던 농촌에서는 도시로의 이동을 시작하게 된다. 수도권 인구집중은 정부의 재정금융정책도 한몫을 하였다. 재정금융정책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금융기관이 수도권에 집중하게 되고 기업의 입장에서는 사무직 종사자들을 수도권에 집중시키는 것이 이윤을 극대화하고 비용을 극소화하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는 사무직종의 일자리를 수도권에 집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수도권은 지방에 비해 교육의 기회가 많았다. 주요 유수의 대학이 서울에 집중해 있었기 때문에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서울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각종 문화적, 오락적인 혜택 역시 수도권이 지방에 비해 월등히 나았다. 이로 인해 수도권은 노동력의 수요보다 공급이 늘어나는 공급과잉이 되고 이로 인해 수도권 인구는 급팽창하였으며 농촌의 인구는 급감하였다. 수도권 인구집중은 지방의 황폐화와 인구 집중으로 인한 수도권의 삶의 질 저하 문제, 부동산 초과수요에 따른 가격 급등과 투기의 악순환 등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