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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장 메시지=
함께 한 2013년, 한양의 자긍심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2013년은 ‘한양의 유일 가치’를 우리의 모토로 하여 한양을 차별화하기 위해 노력한 해였습니다. 한양의 차별화만이 다른 대학이 넘보기 어려운 우리 대학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다양하고 창의적인 사업을 펼쳐왔으며,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우리가 이루어 온 성과를 바탕으로 앞으로도 한양의 유일 가치 창출을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올 한해는 우리 한양뿐만 아니라 국내 대학이 구조개혁이라는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양대학교는 대학이 직면한 위기를 기회로 삼아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2014년을 맞이하고자 합니다. 한양대학교는 그 동안 추진해왔던 ‘자율책임 경영’을 비롯한 독창적인 정책과 사업을 통해 대학의 경쟁력을 강화하여 ‘우수한 대학’, 더 나아가 존‘ 경받는 대학’, 훌‘ 륭한 대학’을 만드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습니다. 오늘날 한양이 대한민국의 성장동력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시는 여러분 덕분입니다. 그 관심과 성원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깊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지난 일 년 동안의 성과를 작은 책자로 펴냈습니다. 2014년에도 한양은 쉼 없이 발전을 거듭할 것입니다.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한양대학교가 세계 일류대학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봐 주십시오. 앞으로도 한양대학교에 변함 없는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The Engine of Korea! 한양대학교 '''-한양대학교 총장 임 덕 호 -'''
 
=30가지 이슈=
* 1일 외래환자 : 4,722명(서울 2,814명, 구리 1,908명)
* 병상 수 : 1,402명(서울 : 813명, 구리 589명)
 
=2013 HANYANG UNIVERSITY 광고 갤러리=
* 주요 일간지 신문지면 광고 소개
 
=응답하라 한양 1994=
'''1994년 그때로 돌아가 살펴보는 한양대학교 10가지 이슈'''
 
* '''국내 첫 메이저리거, 박찬호''' : 당시 92학번 재학생 박찬호 선수가 1월 미국 프로야구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팀과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드디어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로 마운드에 올랐다. 박찬호 동문은 2012년 공식 은퇴할때까지 코리안 특급이라는 별명답게 전설적인 기록을 남기며 전 국민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그해 이승엽의 한양대 입학이 좌절되지만 같은 동문이 될뻔했던 박찬호와 이승엽과의 인연은 16년후 일본 오릭스팀으로 이어진다.
 
* '''대학 '사회봉사'의 원조''' : 아직은 봉사에 대한 인식이 적었던 시절, 전문적으로 봉사활동을 가르치고 운영하기 위해 대학중에서 가장 먼저 '사회봉사' 과목을 정식수업으로 개설하고, '대학 사회봉사단'을 창단하면서 대학의 설립이념인 '사랑의 실천'을 구현했다. 국무총리까지 참석할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던 창단식 이후, 한양대는 다른 대학들이 사회봉사단을 만드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2012년 국내 대학 최초 '동문 사회봉사단, 함께한대' 출범으로 그 의미를 이어갔다.
 
* '''정상에 선 '스포츠 한양' ''' : 프로와 견주어 손색없는 대학 스포츠팀으로 한양대 선수들이 정상에 섰던 한해였다. 대학야구에서는 3년만에 정상 탈환,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7년만에 정상 복귀, 유도 단체전에서 남자부 우승을 거머쥐는 등 여러 대회에서 최절정의 기량을 선보였다. 운동선수 중 가장 많은 여성팬을 갖고 있다는 배구스타 김세진 동문은 당시 3학년 재학중에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 '입시 전쟁'의 서막''' : 교무처 산하 입학관리과를 신설하고 서울과 안산캠퍼스 전학과에 대학별고사를 도입하는 등, 당시 입학 판도를 이끌었던 한양대. 한 언론사는 뜨거운 입시 전쟁 상황을 '잎시 앞두고 대학 홍보전 점입가경'이라고 표현했다. 당시 한양대의 슬로건은 '발전하는 대학이 미래를 약속합니다'. 그 해 특차 모집 합격자의 평균 수능점수는 162.9점이었고 수석의 영광은 광양고 김동원 군에게 돌아갔다.
 
* '''시대의 소용돌이, 한총련''' : 한양대만의 이슈는 아니었지만 당시 대학가는 '한총련'을 빼고 얘기할 수가 없다. 바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의 사무실이 한양대 내에 있었던 것. 때문에 각종 시위와 경찰과의 대치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결국 7월 한총련 사무실은 타대학으로 옮겨지게 된다. 우루과이라운드 비준 저지를 위해 기말고사가 연기 되는가 하면, 통일대축전 개최장소로 발표되면서 한양대 캠퍼스는 결코 조용할 수가 없었다.
 
*''' '이슈메이커 총학생회' ''': 새로운 시도로 대학가의 이슈메이커였던 한양대 총학생회. 5월. 학생운동이 심하던 그 시기에 의경에게 농구대를 기증하고 친선경기를 열었던 현장에는 운동권 노래와 군가가 함께 울려퍼지는 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9월. 학생 500여명이 참석한 개강맞이 떡잔치가 성대하게 열렸다. 그 자체로 큰 문화행사였다. 12월. 국내대학 최초로 총학선거 후보들의 유세연설이 교내 유선방송망을 타고 13대의 TV에 송출됐다. 시대를 앞서가는 새로운 트렌드에 학생들은 열광했다.
 
*''' '의료혁신' ''', [한양대병원] : 1972년 동양최대 규모로 문을 연 한양대병원은 의료 혁신의 현장으로 주목받았다.
** 1월. 전자동정제약조제기(ATD) 시스템 도입
** 3월. 엑스포 도우미를 병원 안내요원으로 채용-서비스 개선
** 6월. 내시경을 활용한 성형 수술 방법을 도입해 큰 인기
** 9월. 골반이 붙은 채 태어난 쌍생아를 분리하는 수술 국내 최초 성공
** 한국인 태아 식음자료 연구 결과 국내 최초 완성 발표
 
*'''실천하는 교수의 모습''': 치열한 현장을 함께하는 교수님들이 있었다. 인문대 교수 20여명은 교내 대자보를 통해 당시의 학생운동을 비판하는 입장을 발표해 학생들이 바로 갈 수 있도록 스승의 역할을 했으며, 고영수 교수는 소비자안전을 위해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법정 소송에 휘말렸지만 무죄판결을 받으면서 그해의 소비자뉴스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공음대 교수의 유족은 고인의 뜻을 받들어 시신과 전재산 3억여원을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 기증해 감동을 줬다.
 
*'''중장기 발전 계획으로 '한발 먼저' ''': 대학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시도는 대학 최초 '중장기 발전계획' 수립으로부터 시작했다. 그해 1월 삼성경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시작된 이 작업은 10월에 공식 선포되면서 각종 대학 개혁의 제도들이 도입되도록 했다. 또한, 미국 우주항공기업인 그라만社와의 산학협력 체결은 국내 대학이 외국기업과 맺은 최초의 협약으로 기록됐다. 대학 최초 산학협력단을 만들고 최근에는 기술이전실적 1위에 오른 한양대의 저력이 시작된 해라 할 수 있다. 이런 대학의 선도적인 활동은 취업시장에서도 나타나 기업들의 채용선호도 조사에서 당당히 1위를 했다.
 
* '''대학가 기류는 '실용학풍' ''': 94년 대학가는 '실용학풍'의 기류가 확산되고 있었다. 컴퓨터나 외국어 능력이 재학중은 무론 취업시에도 반영되도록 여러 제도가 생겨났다. 어학연수가 학점으로 인정되고 영어강의제가 실시되기도 했다. 학부생도 교비로 해외유학이 가능하도록 기회가 열렸고, 학사관리가 대폭 강화된 해로 기록되어 있다. 강의실내 흡연도 그때부터 금지됐다. 인터넷 시대를 열면서 5월에 한양대학교 홈페이지가 개설되었다.
 
'''…그리고, 역사 속 한양대'''
"1994년, 그해 한양대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개교 55주년을 맞이하던 그때. 총장은 제8대 김종량 총장이었고,
 
대학 정원은 학부 5610명, 대학원 2635명이었다.
 
한양인의 삶과 문화 그리고 이야기가 있었다.
 
처음 대학종합평가가 이루어진 1994년.
 
대학동문카드의 인기가 뜨거웠던 1994년.
 
많은 외국 대학들과 자매결연을 맺으며 글로벌화의 큰 걸음을 내딛었던 1994년.
 
1400여명의 학생이 추석 귀향버스를 타기 위해 한마당에 모이던 1994년.
 
농활이 한양대에서 국내 최초 학점으로 인정되던 1994년.
 
역사와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양의 1994년은 지금도 우리에게 응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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