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CA40년사/1980년대학생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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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A40년사 중 1980년대 안산캠퍼스 학생활동 관련 내용입니다.

학생운동과 학생자치기구의 변천

학도호국단과 총학생회

  • 1970년대 말 유신체제의 종말과 1986년 6월 항쟁의 중심에는 노동자, 교수, 재야 민주인사뿐 아니라 학생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학생 자치조직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저항의 중심이었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를 이끌었던 학생조직은 군사정권의 몰락에 따라 호국단 체제가 학생회 체제로 변화를 맞게 된다.
  • 1980년대 중반까지 존속한 학도호국단은 1949년 9월 당시 학원 내에 침투하는 좌익 계열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명분하에 결성되었다. 자유당 정권에 의해 정치적 이용을 당한 학도호국단은 4·19로 인해 해체되고 총학생회가 결성되었다. 그 후 5·16 때 재건학생회로 개편됐다가 군정이 민정으로 되면서 학생회로 원상 복귀했다. 학생회는 1975년 월남과 크메르가 공산화되는 등 국제정치의 변화로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면서 해체되고 학도호국단으로 재편성된다. 이 학도호국단의 특징은 군대식 편제 및 임원의 하향식 임명제도에 있다. 편제는 사단, 연대, 대대, 중대 등으로 나뉘었으며, 임원도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1975년 한양대학교 학도호국단 설립 당시에는 4개 연대와 1개 학군단 대대로 구성되었으며 1978년에는 학군단 대대가 연대로 승격되었고, 1979년 반월분교가 설치되면서 반월분교 연대를 신설하여 모두 6개 연대체제가 갖추어졌다. 임원은 학도호국단 단장인 총장이 임명하였다. 학생대표를 선출하는데 학생이 배제되고 자신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았으며, 정권의 교육정책을 실행하는 학도호국단에 대해 학생들의 거부감은 컸다. 이는 1980년 2월 ‘총학생회 부활추진위원회’에서 발간한 자료집 ‘학원민주화를 위한 제 1차 공청회를 열면서’에 잘 반영되어 있다.
학도호국단은 그 자체가 경직된 정부에 의한 민주운동을 조직적으로 억압하려는 제도로서 학생의 자율성을 부정하고 하향식 군대편제를 통하여 학원 내 민주운동을 억압하여 학생의 비판능력을 말살하고 대학의 본질을 왜곡하려는 점, 대학의 진리 탐구 및 자치 활동을 제도적으로 간섭하여 그 창조적 기능을 부정하고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하도록 했고 학생들에게 소시민적인 이기적 안위와 영달만 추구케 하여 민주주의 및 자유와 평등에 대한 무관심으로 유도한 호도책이었다는 점 등으로 대학의 본질과는 양립할 수 없는 제도임이 명백하다….
  • 학도호국단 체제하에서 학생들의 의지는 동아리활동으로 표출되었다. 비판적 동아리들은 활발한 토론을 통해 유신체제하의 한국사회, 한국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 학생운동의 과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러한 사회 비판적 동아리들의 논의는 80년대 학생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 당시 서울캠퍼스 학도호국단 산하 연대로서 조직이 미약했던 반월분교는 1년 여의 서울캠퍼스시절 영향을 받은 민속문화연구소, 유네스코 학생회 등 동아리 조직에 의해 학생들의 정치적 의사가 반영되고 있었다.

민주화를 위한 열정과 노력

  • 박정희 정권의 종결은 그동안 숨죽여왔던 민주화의 열기가 분출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하여 1981년 관제성격의 학도호국단이 해체되면서, 학생회 설립 움직임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12·12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5월 광주를 무력으로 탄압, 일체의 민주화에 대한 열기를 억누른다. 당시 한양대학교 반월분교는 준공 전 임시로 마련된 공학대학에서 수업을 하다 1980년 3월 20일 반월분교로 이전하여 새롭게 시작하는 시기였다.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개강한 반월분교는 전국에서 일어난 대학생의 사회민주화 운동에 동참, 전국 대학생들의 가두 진출이 시작된 5월 14일 반월분교 학생 300여 명도 안양시내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에서 많은 학생들이 최루탄 등으로 인해 부상을 입었으며, 28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리고 5월 17일 저녁, 비상계엄조치 확대 실시가 발표되면서 우리 대학에도 휴교령이 내려졌고 학생운동의 주역들은 계엄당국에 연행되어 갔다. 그리하여 우리 대학의 학생 민주화 운동은 일시 중단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 광주를 비롯하여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민들을 무력으로 짓밟은 정부는 국가권력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6월 1일, 이른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하여 위원장으로 전두환이 취임하게 된다. 이어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체육관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헌법을 개정하여 1981년 2월 25일 대통령선거를 실시, 3월 3일 7년 임기의 12대 대통령으로 다시 취임하였다. 이렇게 출범한 군사정권은 민주화운동 세력을 극도로 탄압하였고 1983년 학원자율화 조치를 발표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84년 서울대를 시발점으로 총학생회가 부활하며, 학도호국단이 폐지되었다. 당시 문교부는 학생회 부활의 전제 조건으로 ‘문교부 5원칙’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학생회칙에 △학생의 정치활동 금지 △지도위원회 설치 △학생회비 집행의 감독 △학생대표자의 자격 제한 △학생대표의 교수회의 참석 금지 등의 조항을 반드시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교부는 또한 ‘학생자치기구 운영 지침’을 내리고, ‘각급 회장 자격기준’으로 ‘학도호국단 운영 규정’이었던 △품행이 방정하고 지휘통솔능력이 있는 자 △원칙적으로 성적 평균이 ‘B’학점 이상인 자 △징계 또는 유급을 받은 사실이 없는 자 △출석 상황이 양호한 자 △입후보 당시 4학년생이 아닌 자로 한정시켰다.

학도호국단의 폐지와 학원민주화운동

  • 우리 대학 역시 총학생회 부활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서울캠퍼스는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 안산은 ‘학생자치기구 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러한 와중에 정부는 경기도 개발 억제 방침을 발표하였다. 반월(안산)에서는 전문대학 이상의 고등교육기관의 신ㆍ증설 및 학생정원의 증원, 그리고 기존 정원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 이외의 신ㆍ증축을 억제한다는 내용의 ‘수도권 정비 기본계획’이 그것이다. 이로써 70년대 말에 수립된 안산에서의 분교 설립과 발전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던 정부의 정책은 새로운 군사정권에 의해 완전히 뒤바뀌어졌다. 이에 100여 명의 학생이 스크럼을 짜고 “일관성 없는 문교정책 철폐하라” “무능한 호국단 해체하라” “학원자율 보장하라” “마스터플랜 공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시위를 벌였고, 300여 명이 합세하여 교문 밖 대학동 파출소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다시 교내로 들어와 학생회관 앞에서 가칭 학생 자치기구 추진위원회(학자추위)를 결성하여 위원장에 김명호(일어일문학과 3), 조직부장에 김기호(생화학과 1), 총무부장으로 최창호(금속재료과 1) 군을 선출하였다. 이어 ‘학생 자치기구 추진위원회’ 발기 성명서를 통해 결성 동기(문교정책 철폐, 마스터플랜 공개, 호국단 퇴진)를 밝히고 이러한 학원자율화를 위해 끝까지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또한 학생 자치모임의 활성화를 위해 동아리(당시 서클) 연합체도 결성했다. 20일에는 총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2,500여 학생이 교문 밖까지 진출하여 무장경찰과 충돌하였다. 학교에서는 김기호(생화학과 1), 김명호(일어일문학과 3), 최장호(금속재료과 1) 등이 연행되었다. 이들은 경찰 연행 뒤 7시간 만에 제적이 결정되었으며 위원장이었던 김동수(영어영문학과 3)도 뒤이어 제적되었다. 이에 당시 호국단은 책임을 지고 총사퇴의사를 밝혔다. 학교당국의 징계조치는 한양대학교 전체 학생운동의 새로운 이슈가 되어 안산캠퍼스에서는 항의 유인물이 배포되었고 서울캠퍼스에서도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이로 인해 서울캠퍼스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해온 학원민주화 추진위원장 김기순(법학과 3) 군과 부위원장 김행준(도시공학과 3) 군이 무기정학을 받자 사태는 증폭되어 본관과 학생회관을 점거하고 농성이 이어졌다. 그러나 학교당국은 이 두 학생의 제적으로 맞섰고 학생들은 다시 이에 항의하는 시위와 징계의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총학생회의 부활과 분리

  • 한편 1985년 4월 3일 처음 치러진 한양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에서 진창호(반월, 경제학과 3) 군이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제1총부학생회장에 이재홍(서울, 경영학과 3) 군이, 제2총부 학생회장에 주용협(반월, 전자공학과 4) 군이, 제1여학생회장에 이종숙(서울, 가정관리학과 3) 양이, 제2여학생회장에 최혜자(반월, 사회학과 3)양 이 각각 선출되었다. 당시 부활된 학생회 조직은 총학생회와 12개 단과대학 학생회, 그리고 83개 학과의 학회로 구성되었다. 당시 단과대가 15개였음에도 불구하고 12개 단과대학에만 학생회가 구성된 것은 반월캠퍼스가 4개 단과대학을 반월대학이란 명칭 하에 하나로 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울과 반월캠퍼스에 단과대학 학생회에 준하는 여학생회가 각각 설치되었다. 총학생회에는 총학생회장 1인과 서울과 안산캠퍼스를 각기 담당하는 제1, 2총부학생회장과 총무, 기획, 학술, 사회, 문화, 체육, 섭외 등 7개 부를 두었다. 단과대 학생회에는 회장과 부회장 각 1인만을, 여학생회에는 회장 1인만을 두었다. 반월캠퍼스 학생회는 다른 단과대 학생회와는 달리 부회장을 두지 않고 총무, 기획, 학술, 사회, 문화, 체육 등 6개 부를 두었다. 이는 반월캠퍼스 전체를 관장하는 반월캠퍼스 학생회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 조치가 서울과 반월 사이의 알력싸움으로 변질되어 양 캠퍼스 간의 대립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안산캠퍼스의 독자적인 행보의 시작

1985년 ‘삼민투위’가 결성될 즈음 총학생회장단의 사퇴권고를 결의하게 된 것은 양 배움터를 단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10월 24일 86학년도 총학생회 설립을 위한 선거를 앞두고 학생회는 학교 측과 합의하여 서울과 반월캠퍼스의 공동의장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반월캠퍼스는 회칙 상에 성문화된 모든 기구를 서울캠퍼스와 동일하게 운영하고 예산에 있어서도 서울캠퍼스와 분리되었다.

1987년 본관 방화사건

  • 1987년 신학기가 시작되자 학생운동의 쟁점으로 등장한 것은 ‘전방입소교육’이었다. 군사정권이 학교도 병영화한다는 비판 속에 진행되어 온 전방입소교육에 대한 저항이 시작된 것이다. 안산캠퍼스 학생들은 민주광장에 모여 ‘조국분단현장 순례대행진 환송회’와 故 ‘이세진, 이재호 열사추모제’를 가진 후 입소하였다. 전방입소교육이 끝나자 학생들은 ‘학원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4월 27일 구성된 ‘학원민주화 쟁취투쟁위원회’(위원장 최오진, 경제학과 4, 이하 학민투)에 의해 주도되었다. ‘학민투’는 대자보와 기관지 <민주한양>을 통해 크게 네 가지 이슈를 제기하였다. 첫째 마스터플랜 공개 및 실시, 둘째 학내 후생복지시설 문제, 셋째 서클활동의 자치보장, 넷째 학원정보사찰 및 기관원의 학내 출입에 대한 공개사과 요구가 그것이다. ‘학민투’는 안산캠퍼스 총학생회와 서클연합회의 지지를 받으면서 요구사항의 관철을 위해 28일부터 집회와 시위를 시작하였고, 29일에는 수업거부를 결의하였다. 30일에는 4,500여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민주광장에서 집회를 가졌으며, 5월 1일에는 학내에 진입한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는데 이날 28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다. 학내시위가 이와 같이 전개되자 학교당국은 최오진 군 등 ‘학민투’ 임원과 총학생회장 정인재(신문방송학과 4) 군 등 총학생회 간부를 비롯한 112명에 대해 제적 또는 정학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연행학생 석방과 징계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였고 분위기는 격앙되어갔다. 이러는 가운데 5월 6일 본관이 방화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찰과 검찰은 이 사건이 학생들에 의해 사전에 철저히 모의된 후 실행된 것이라고 발표하고 최오진, 노형진(‘학민투’위원, 금속재료공학과 4) 군, 정인재 군을 방화혐의로, 부총학생회장 김휘동(기계공학과 4) 군을 방화방조혐의로 각각 구속 기소하였다.
  • 이에 대해 학생들은 사건은 철저히 조작된 것이며, 방화범은 학생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증거는 없으나 자술서 내용을 그대로 믿고 유죄를 인정한다”며 최오진 군과 노형진 군에게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각각 선고하였다. 이같은 판결에 대해 최오진 군은 “자술서는 고문에 의한 것이고 내가 얘기한 것이 아니라 이미 짜여진 각본을 시인하게 한 것(한대신문 1987년 9월 17일자)”일 뿐이라며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988년에는 87년 사건 당시 총부학생회장이던 김휘동 군 역시 고문기술자로 불리던 이근안 경감이 본관 방화 조작사건을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방화사건 후 3년이 지난 90년 한대신문(1990년 5월 3일 816호)은 “5공화국이 호헌발표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로 인한 불리한 정국을 벗어나고자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악용했다는 추측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라며 당시 사건을 되돌아보고 있다.
  • 한편 1987년 5월 13일 학생들은 ‘학원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는 사건 직후 ‘학민투’와 총학생회 임원 15명이 구속되고, 18명이 수배되어 두 기구가 와해된 데 따른 것이다. 수습위원회는 보직교수와 간담회를 가졌다. 이 간담회에서 학교는 합동강의실, 여학생 기숙사, 소강당을 89년까지 건립하고 이를 표기한 조감도를 7월경까지 설치하겠으며 통학버스를 증차하고 매점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6월 5일 와해된 총학생회를 재건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고 정갑식(전자계산학과 3) 군이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6월 항쟁 이후의 학생운동

  • 6월 항쟁과 그것의 성과인 6·29 선언 이후 정국과 사회는 급변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정치인과 민주인사들이 사면 복권되었고, 여·야간 개헌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산출된 단일 개헌안이 10월 12일 국회를 통과, 곧바로 국민투표에 회부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노동자들이 전국 각 사업장에서 새로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노동조건의 개선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7, 8, 9월 노동자 투쟁’을 벌였다. 이는 정치적 민주화운동이라 할 수 있는 6월 항쟁에 뒤이은 경제적 민주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 10월 27일자 국민투표로 직선제 개헌안이 확정되고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자 부정선거에 의해 이와 같은 결과가 나왔다며 집권반대 시위가 잇따랐다. 학생들은 수원, 안양 등지에서 열린 대학연합집회에 참가하고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다. 새 학기가 되자 학생들은 4월 총선에 역량을 집중했다. 총학생회는 4월 18일 산하에 ‘반노 반민정당 총선특별위원회’(위원장 안명치(기계공학과 4))를 구성하고, ‘경인지역 대학생 총연합 건설추진위원회’와 함께 공동으로 총선활동을하였다. 이에 18일부터 부분적으로 수업을 거부하고 교내 집회, 안산지역에서의 선전활동, 가두시위 등을 수행하였다. 전국에 걸친 학생들의 반 노태우, 반 민정당 분쇄 운동으로 여당인 민정당이 참패하면서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는 여소야대 정국을 이룩한다.

등록금 문제와 총학생회의 활동

  • 총선 후 학생회는 군부독재의 잔재인 ‘전방입소교육’에 대한 거부 움직임을 보였다. 우리 대학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전개된 ‘전방입소 철폐투쟁’은 마침내 정부로 하여금 1989학년도부터는 대학에서 교련교육을 폐지한다는 발표를 이끌어 냈다. 연말에는 등록금 문제가 교내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10월 중순 문교부가 등록금 책정을 대학 자율에 맡기겠다는 발표 후 고조된 등록금 문제는 자율화될 경우 급격히 오를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선거에도 반영이 되어 양 캠퍼스 총학생회 선거에도 등록금 문제를 제기한 임종석(무기재료공학과 3) 군과 임연규(일어일문학과 3) 군이 각각 당선되었다. 12월 26일부터는 총학생회 산하 ‘재단비리 척결 및 민주학원건설투쟁위원회’ 소속 50여 명의 학생들이 총장실을 3일간 점거하고 신입생 등록금 동결 등을 요구하였다. 학교 측은 신학기 개강 후 신입생의 의견을 물어 입학금을 동결시키겠다는 몇 가지의 사항을 약속했으며, 1989년도 등록금은 전면 동결되기에 이르렀다.